│경주 대릉원大陵苑 안내 간판


│경주 대릉원大陵苑 입구


│경주 대릉원大陵苑


대릉원에는 봉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21기의 고분이 있다. 이 중에 천마총, 황남대총, 검총을 비롯해 6기의 고분이 발굴되었으며, 봉분은 남아 있지 않으며 고분 발견지라는 비석만 세워 둔 곳이 6군데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 고분과 그 이전 시대인 단군조선의 고분의 공통점은 돌무지무덤인 적석총이다. 시대마다 조금씩 변형을 주기는 했으나 큰 틀에서는 변함이 없다. 대릉원의 고분을 봉문만 보고서는 흙무덤으로 볼 수 있으나, 천마총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석실에 석관묘를 두고 돌무지를 쌓았으며 최종적으로 흙으로 덮었다.

│경주 대릉원大陵苑 소나무 숲


│경주 대릉원大陵苑 소나무 숲


│경주 대릉원大陵苑 미추왕릉 입구


길을 따라가면 신라 13대 왕의 미추왕릉이 있다. 미추왕(서기 262년~284년)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 역사에서 김씨로 처음 왕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미추왕의 선조인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후에 왕을 보필하는 대보大輔로 삼았다. 김알지로부터 세한, 아도, 수류, 욱보, 구도로 혈통이 이어지며 구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미추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미추왕은 백성들을 위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바다에서 망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종묘인 국조묘에 나가 선왕들에게 제사를 올리며 성군으로써 정치에 힘썼다. 재위 마지막 해인 23년에는 백제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일일이 찾아 어루만져 주었으며 그 해 겨울 붕어하시어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23년(서기 284) 봄 2월,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두루 돌며 위로하셨다.
겨울 10월, 임금께서 승하하셨다. 대릉(大陵)[또는 죽 장릉竹長陵이라 한다.]에 장사 지냈다.
二十三年 春二月 巡撫國西諸城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竹長陵]

│경주 대릉원大陵苑 검총劍塚


경주 검총은 신라 고분들 중 가장 먼저 학술적 조사가 실시된 것으로서 경주 황남동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대릉원 내의 미추왕릉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분은 1916년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關野貞 등이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철검鐵劍이 출토되어 검총으로 명명되었으며, ‘황남동 제100호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검총에서는 성격이 다른 유물들이 출토되어 의견이 분분하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9년(서기 435)의 "역대의 능원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생각해 볼 때, 검총이 가지고 있는 그런 문제점들이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19년(서기 435) 봄 정월,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2월, 역대(歷代)의 왕릉을 보수하였다.
여름 4월,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十九年 春正月 大風拔木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祖廟

│경주 대릉원大陵苑


│경주 대릉원大陵苑 검총劍塚


│경주 대릉원大陵苑 검총劍塚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어 뒤이어 북쪽 무덤을 잇대어 만들었다. 이들을 부부로 추정하며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무덤의 주인들이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마립간기의 왕릉으로 보고 있다.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제17대 내물 이사금과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중 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주헌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실장이 파격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왕릉인 경주 황남대총이 신라의 왕과 왕비가 묻힌 무덤이 아니라 선후대의 왕이 나란히 묻혀 권력을 과시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는 남문과 북분이 표주박 모양으로 붙은 이 거대한 쌍동이 무덤을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없으며, 5세기 눌지, 자비, 소지 마립간으로 김씨 왕계의 세습체제가 확립되면서 왕통이 계승된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경주 대릉원大陵苑 황남대총皇南大塚


│경주 대릉원大陵苑 황남대총皇南大塚


│경주 대릉원大陵苑 황남대총皇南大塚


│경주 대릉원大陵苑 황남대총皇南大塚 사적비


│경주 대릉원大陵苑 황남대총皇南大塚 앞 연못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가 발굴된 천마총은 1만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천자의 금관도 함께 출토되었다. 전 세계에 14개의 금관이 있는데, 그중 10개가 우리나라에 있다. 세계 최고이자, 최대의 금관 보유국이다. 금관은 왕관 문화의 원형이기도 하다. 신라의 문화를 추적해보면 동서 교역의 역사와 더불어 고대 한국의 뿌리를 더욱 선명하게 찾을 수 있다.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역사를 알 수 없다.

│경주 대릉원大陵苑 천마총天馬塚 입구


│경주 대릉원大陵苑 천마총天馬塚 안내판


│경주 대릉원大陵苑 천마총天馬塚 내부


│경주 대릉원大陵苑 천마총天馬塚 금관金冠


│경주 대릉원大陵苑 천마총天馬塚 장니障泥


│경주 대릉원大陵苑 천마총天馬塚


│경주 대릉원大陵苑 안내


│경주 대릉원大陵苑 안내 간판


전날 내린 비로 맑고 시원한 하늘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경주慶州를 감싸고 있는 산줄기와 굽이도는 남천과 형산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는 낮은 건물로 더욱 안정감이 느껴졌다. 천 년 왕도를 일으킨 신라 화랑들이 빼어난 산수에서 호연지기를 길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상도의 산세는 원래 높고 거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곳 경주의 풍수에서 전라도와 같은 순후함이 느껴졌다. 옛말에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고구려와 백제의 강인한 기상에 눌려 삼국시대 내내 약체였던 신라가 오히려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대사가 기억난다. "강한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역발산 기개의 천하제일 항우도 못난 유방에게 결국 패하지 않았던가. 그럼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신라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 화랑인 것은 알아도 정작 화랑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
백제와 신라의 역사는 미륵신앙을 함께 봐야 한다. 역사를 보는데 갑자기 무슨 종교 타령이냐 하시겠지만, 동서고금의 역사 문화 유적이라는 것이 종교를 떠날 수 없다. 유럽의 역사유적들은 그리스도교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며, 인도의 역사유적들은 불교, 힌두교 문화다. 중국의 역사유적은 도교, 불교, 유교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의 정체성을 형성한 원형문화, 시원종교를 찾아야 한다. 고대 한국의 원형문화를 계승한 신라 불교의 뿌리를 찾는 일은 단순한 역사 복원이 아닌 남북통일의 새로운 비전을 세우는 기초작업이다.

경주 대릉원 담장 너머 옹기종기 모인 한옥 지붕들이 왕릉과 어우러져 마을을 이루고 있다. 도솔 마을이라 한다. 왜 마을 이름을 도솔兜率이라 했을까? 도솔兜率은 불교에서 '최상의 자리에서 만유를 거느린다'는 뜻인데, 이는 통일, 완성을 의미한다. 불교 세계관에서 도솔천兜率天은 3계 33천의 중심 하늘로 천상의 호천금궐에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미륵 천주께서 임어해 계신 곳이다. 곧 신라 왕궁은 지상의 도솔천이며 왕은 미륵이라는 의미다. 신라 왕실이 천상의 도솔천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한 이상 세계의 꿈은 경주 불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불국사佛國寺는 곧 부처의 나라, 불국토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최치원은 불국사가 원래 화엄 불국사였다고 기록(화엄불국사찬가,
최치원 지음)했다. 화엄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는 불교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은 선제 동자가 미륵불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신라 불교는 석가불이 아닌 미륵불 신앙임을 알 수 있다.

│경주 대릉원 밖 도솔 마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에는 이미 전불 시대의 불법이 있었다. 지증왕智證王의 아들인 법흥왕法興王(서기 514~540)은 재위 15년(서기 528) 역수입된 불교를 공인한 이후 최초로 건립한 사찰인 흥륜사興輪寺에 미륵불의 존상을 봉안하였다. 신라 불교는 미륵신앙과 용화 낙원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신라의 왕들은 스스로를 천상의 도솔궁에서 지상으로 하생하여 미륵불의 용화 낙원을 실현하는 전륜성왕으로 생각했다. 진흥왕眞興王(서기 540~576)은 두 아들을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으로 불렀다. 바로 진흥왕 자신이 전륜성왕이며 미륵 하생경에서 말하는 미륵불의 용화 낙원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했던 종교적 신념과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지왕眞智王(서기 576~578)은 화랑花郞을 국사로 삼았는데 구제 중생을 위해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이라 여긴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화랑을 따르는 무리를 미륵불을 수호하는 낭도인 용화낭도龍華郎徒, 혹은 미륵불을 모시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화랑세기에서는 선도仙道로써 신궁神宮을 받들어 세우고 천제天祭를 지낸 집단으로도 화랑을 묘사하고 있다. 김유신이 수련한 단석산에 오르면 정상 부근의 상인암 바위에 미륵삼존대불이 조각되어 있고 그 바위 아래 신령한 땅에 세운 신선사神仙寺라는 절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 불렀다.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공을 아낌없이 따르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신라의 미륵신앙은 760년 통일신라 경덕왕 19년 김제 만경 출신의 진표율사를 통해 백제의 미륵신앙을 흡수하며 완전히 대중화된다. 미륵을 자처한 궁예나 견훤처럼 후삼국을 거쳐 왕건의 고려가 건국되며 미륵신앙은 더 굳건해진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 창건의 정신적 통합을 이룬 토대로써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경주 대릉원大陵苑


│경주 대릉원, 지도 (출처: 소년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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